성 안나, 성모자, 어린 세례자 요한 (The Virgin and Child with Saint Anne and Saint John the Baptist / The Burlington House Cartoon)
'성 안나, 성모자, 어린 세례자 요한(The Burlington House Cartoon)'은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1499년에서 1500년경 또는 1506년에서 1508년경 여러 장의 종이를 이어 붙인 뒤 숯(Charcoal)과 흑백 초크를 사용하여 완성한 대형 카툰(실물 크기 밑그림) 명작으로, 현재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London)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밀라노 공국의 붕괴 직후 피렌체로 돌아왔을 무렵, 레오나르도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세례자 요한이 이루는 신성한 가족 구도를 구상하며 이 대형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 이 밑그림이 피렌체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의 작업실에 공개되었을 때, 이틀 동안 수많은 피렌체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찾아와 줄을 서서 감탄했을 만큼 격렬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여러 인물의 신체가 밀도 있게 교차하는 모뉴멘털한 구도와 스푸마토 기법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대형 드로잉은, 르네상스 시기 완성작 유화 못지않은 독립적인 명작으로 인정받는 거장의 대표적인 밑그림 유산입니다.
종이 위 은은하게 펼쳐진 숯과 초크의 톤은 숭고하면서도 환영적인 아우라를 선사합니다.
성 안나의 무릎 위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보듬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오른쪽에서 그를 향해 가죽옷을 입고 다가온 어린 세례자 요한에게 축복의 손짓을 건넸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고 있는 성 안나의 동작은 신의 초월적인 뜻과 구원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숯을 부드럽게 문질러 인물의 살결과 옷주름에 음영을 준 스푸마토 표현은 몽환적인 안개 속에서 성스러운 인물들이 방금 떠오른 듯한 깊이감을 더합니다.
어둠과 빛이 스며든 종이의 결 속에서 신성한 가족의 온기를 마주합니다. 거장은 세밀한 윤곽선을 지워내고 오직 부드러운 숯의 그라데이션만으로 네 인물의 영혼이 하나로 연결되는 감동적인 순간을 이뤄냈습니다.
성 안나의 아늑한 미소와 자식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자애로운 눈빛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고리를 말해줍니다. 축복을 내리는 아기 예수와 그를 경배하는 어린 요한의 눈빛 교환은, 머지않아 맞이할 신성한 사명과 순난의 운명을 조용히 속삭입니다.
레오나르도의 손길이 지나간 숯 자국 하나하나에는 형태를 넘어 영원의 아우라를 완성하려 했던 거장의 미학적 집착이 숨 쉬고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으로 빛바랜 종이의 질감은, 거장이 남긴 이 정교한 서정시를 한층 더 고색창연하고 깊이 있게 빛내줍니다.
이 대형 카툰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형 드로잉 중에서 유일하게 손상 없이 전해 내려오는 실물 크기의 대형 종이 유산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카툰은 유화로 옮기기 위해 윤곽선을 따라 바늘구멍을 뚫거나(Pouncing) 칼자국을 내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작품에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레오나르도가 이 드로잉을 단순한 밑그림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독립된 예술품으로 소중히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20세기 미술품 수난사에서 매우 극적인 사건을 겪기도 했습니다.
1987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던 이 그림을 향해 한 남성이 산탄총을 쏘는 대형 훼손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방탄유리가 총탄을 막아냈으나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종이 표면을 찌르는 바람에 일부 손상이 발생했고, 세계 최고의 복원가들이 수년에 걸쳐 종이 파편을 재조합하고 숯 가루를 세밀하게 복원하여 오늘날의 정갈한 모습을 되찾게 된 화려한 잔혹사와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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