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브라 데 벤치 (Ginevra de' Benci)
'지네브라 데 벤치'는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1474년에서 1478년경 피렌체에서 목판에 유채 및 템페라로 완성한 초기 여성 초상화 명작으로, 현재 미국 워싱턴 D.C.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 가문의 지적인 여성이었던 지네브라 데 벤치의 결혼(또는 베네치아 대사 베르나르도 벰보와의 플라토닉한 교유)을 기념하여 의뢰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스승 베로키오의 공방을 떠나 독립적인 화가로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회화 미학을 완성해 나가던 20대 청년기의 대표작입니다. 당대 피렌체 초상화가 엄격한 측면 구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레오나르도는 4분의 3 측면 구도를 도입하고 자연 풍경을 인물 뒤에 배치하는 혁신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훗날 '모나리자'로 이어지는 르네상스 자연주의 초상화의 위대한 출발점입니다.
화면 중심에 자리한 여인의 상반신은 상아빛 피부와 어두운 노나무(Juniper) 숲의 대비를 통해 서늘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를 선사합니다.
• 인물의 머리 뒤편을 가득 채운 세밀한 노나무 가지들은 여인의 이름인 '지네브라(Ginevra)'와 언어유희적 언어 구조(Ginepro=노나무)를 이루며 인물의 신원을 유기적으로 암시합니다.
• 굳게 다문 입술과 서늘하면서도 지적인 눈빛, 그리고 섬세하게 말려 올라간 금빛 곱슬머리는 세속의 화려함보다 내면의 고결함과 지성을 드러냅니다.
• 배경 우측으로 펼쳐지는 아득한 호수와 푸른빛 산수 풍경은 부드러운 대기경시법과 명암법으로 연결되어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를 완성합니다.
어두운 노나무 숲을 뒤로하고 지그시 관람객을 응시하는 여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합니다. 거장은 부드러운 붓 끝으로 피부와 빛이 만나는 경계를 지워내며,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이도 우아하게 빛나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화폭 위에 세워 올렸습니다.
우울한 듯 깊은 정적을 품은 그녀의 표정 속에는 당대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정숙함 너머의 지적이고 독립적인 영혼의 깊이가 서려 있습니다. 노나무 잎사귀 사이로 비쳐 드는 은은한 빛과 멀리 흐르는 호숫가의 푸른 안개는 세월이 흘러 유화 물감의 오묘한 빛깔과 어우러져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묵직한 서정적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몇 가지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품고 있습니다.
우선 이 초상화는 아메리카 대륙(서반구) 전체를 통틀어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는 유일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화 완성작입니다. 1967년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리히텐슈타인 왕가로부터 당시 최고가인 500만 달러에 매입하면서 미국이 소장한 유일한 거장의 유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의 뒷면(Back side)에는 월계수와 야자수 가지가 노나무를 감싸고 있으며, "아름다움은 미덕을 장식한다(Virtutem Forma Decorat)"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정교한 앙베르스(뒷면 그림)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수난을 겪으며 그림 하단이 약 3분의 1가량 손상되어 절단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본 상태에서는 여인이 손에 꽃이나 작은 가지를 쥐고 있는 손 모습까지 포함된 구도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합니다. 인물의 내면적 미덕과 자연의 조화를 정교하게 융합한 이 초상화는, 예술가가 지닌 미학적 안목이 회화의 지평을 어떻게 넓혔는지를 증명하는 소중한 보물입니다.
Read next
카네이션을 든 성모 (Madonna of the Carnation / Madonna mit der Nelke)
살바토르 문디 (Salvator Mundi)
Comment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