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유리새
은은한 먹향이 번지는 화폭 위, 우아하게 호를 그리며 뻗어 나간 가시나무 가지 끝에 단아한 백장미 한 송이가 피어있습니다. 그 주변을 맴도는 두 마리의 새. 상단의 새는 고개를 숙여 갓 피어난 꽃잎의 향기를 탐하고, 하단의 새는 또렷한 눈망울로 상대를 응시하며 조화로운 균형을 이룹니다. 화려한 색채를 거두어내고 오직 먹의 농담과 여백의 미학만으로 완성된 이 그림은 보는 이의 숨을 단숨에 정돈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적만이 흐르는 고즈넉한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백장미와 날개깃을 단정히 가다듬은 유리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목판화 특유의 정교한 선과 스며든 먹의 은은한 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 두 새가 나누는 정겨운 지저귐과 장미 향기가 유유히 흘러 다니는 숨 쉬는 공간이 됩니다.
이 작품은 1885년 1월에 제작된 누마타 카슈의 취조화보에 수록된 장미와 유리새라는 다색 목판화입니다. 나고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전통 화조화의 명수로 이름을 날린 카슈는 1880년대 도쿄 황궁 내부를 장식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만큼 당대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던 거장이었습니다.
작품이 태어난 1885년은 일본에 서구 문물이 밀려들며 전통 목판화가 설 자리를 잃어가던 서구화의 격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카슈는 동양 화조화 고유의 정밀함과 운치를 세련되게 재해석하여 이 화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그림에는 재미있는 비하인드가 숨어 있습니다. 작품 우측 상단을 보면 한자 아래에 조그맣게 가타카나가 함께 표기되어 있습니다. 당시 메이지 정부의 대중 교육 기조에 맞춰, 카슈는 이 작품을 단순한 감상용 그림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자연 속 동식물의 이름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 교육 도감의 역할까지 겸하도록 의도했던 것입니다.
황궁을 수놓던 거장의 정교한 손길이 담긴 이 목판 화집은 당시 서구권 수집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14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현재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중히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Read next
잣나무와 까마귀
버드나무와 청둥오리
Comments ()